쇼팽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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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 쇼팽을 추억하다.
쇼팽은 스물한 살에 조국, 폴란드를 등지고 아버지의 나라 프랑스에 정착한다.
쇼팽은 예술가로서 가장 풍성하고 고통스러웠던 순간을 파리에서 보냈다.
39년의 짧은 삶을 마감한 곳도 파리였다.
재불 음악평론가잉자 피아니스트 김동준이 파리에서 쇼팽의 흔적을 좇았다.
프랑스인들은 종종 쇼팽을 '프레데릭 쇼팽'이라는 폴란드 이름 대신에 '프랑수아 쇼팽'이라고 부른다.
쇼팽과 프랑스, 특히 파리의 인연은 각별했다.
피아노의 천재이며 시인인 그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될 때가 있다.
프랑스인 아버지 니콜라스 쇼팽과 폴란드인 어머니 유스티나크지자노프스카 사이에서 태어난 쇼팽은 폴란드 바르샤바 근교
에서 출생했다.
그러나 그가 가장 극적인 삶을 보낸 곳은 파리였다.
스무 살에 처음 파리를 방문한 쇼팽이 이 도시를 사랑하게 됐고, 이듬해에 정착해 39세까지 살았다.
예술가로서 길지 않았던 그의 삶이 활짝만개한 곳도, 가장 고통스러웠던 곳도 파리였다.
파리에 도착한 쇼팽에게는 두 가지 야심이 있었다.
피아니스트와 오페라 작곡 가로서 성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큰 연주회보다는 살롱에서 연주하는 것을 선호했던 탓에 피아니스트로서 쇼팽의 성공은 그다지 화려하지 못했다.
오페라 작곡가를 꿈꾸었지만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쇼팽의 시상은 피아노곡을 만들때 솟구쳤다.
결국 피아노곡에 전념한 그는 리스트를 비롯한 후대의 작곡가들, 드뷔시, 라벨, 포레 등이 찬사를 바친 걸작들을 남겼다.
그러한 이유로 프랑스인들은 쇼팽을 '피아노의쿠프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당시 파리에서는 리스트, 헤르츠, 힐러 등의 피아니스트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지금은 완전히 잊혀졌지만 당시 파리 음악계에 대단한 영향력을 지녔던 칼크브레너도 있었다.
쇼팽은 그 앞에서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했다.
칼크브레너는 자신에게 피아노를 더 배우라고 권유했다.
당시 스물한 살이었던 쇼팽은 그의 피아노 기교에 강렬한 인상을 받긴 했지만, 가르침을 받을 생각은 없었다.
누군가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세계를 이루는 것이 예술가의 길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파리에 잠시 머물던 멘델스존 역시 쇼팽의 피아노 연주가 칼크브레너보다 훨씬 나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쇼팽은 결국 칼크브레너의 제자가 되는 대신 파리에서 공식적인 연주회를 열기로 결심한다.
한 명의 피아니스트가 홀로 연주하는 형식의 피아노 리사이틀은 당시로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쇼팽은 파리 카테거리 9번지에 위치한 플라이엘의 살롱에서 베토벤 5중주, 협주곡 2번, 모차르트의 아리아 '손을잡고 저기
로 가자' 주제에 의한 변주곡, 그리고 6명의 피아니스트가 6대의 피아노 위에서 연주하는 '피아노 오케스트라'를 위한 프로
그램을 연주했다.
6명의 피아니스트는 칼크브레너, 힐러, 소빈스키, 오스본느, 스타마티, 그리고 쇼팽이었다.
청중 속에는 멘델스존, 라스트 등이 있었다.
이 연주회는 쇼팽의 음악적인 재능을 파리 음악계의 알린 첫 신호탄이었다.
연주회가 성공하자 그에게 피아노를 배우려는 제자들이 모려들었고, 경제적 사정이 좋아지면서 쇼팽은 베르제르 시테4번가
에 둥지를 틀었다.
이후 쇼세-당탱 거리 5번지로 다시 이사했는데 쇼팽은 경제사정에 따라 파리에서만 모두 아홉 번 이사를 했다,
기록에 의하면, 쇼팽은 감각이 매우 뛰어났고, 당시 고위층 사교계의 많은 여성으로부터 인기를 독차지했다.
리스트와의 열애설로 잘 알려진 마리 다구 백작부인도 쇼팽에게 마음이 끌렸을 정도다.
그러나 이런 기간은 쇼팽이 조르주 상드를 만나기 전까지 5년 정도에 불과했다.
1836년 11월 쇼팽은 파리 리스트의 집에서 조르주 상드와 처음 만난다.
쇼팽의 수많은 피아노 걸작들은 두 사람의 사랑에서 탄생하게 되는데, 특히 피아노를 위한 24개의 전주곡이 대표적인 예다.
쇼팽은 상드가 소유하고 있던 노앙의 집에서 여름을 나곤 했는데 쇼팽의 피아노 소나타, Op.35를 비롯한 작품들이 모두 이
곳에서 탄생했다.
쇼팽의 짧은 생애는 폴란드와 프랑스, 두 나라의 삶으로 나뉜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그가 왜 파리에서 폴란드 민속춤의 리듬을 바탕으로 한 피아노곡, 그러니까 마주르카와 폴로네즈 등
을 작곡했을까 하는 것이다.
그건 아마도 돌아갈 수 없는 곳 조국에 대한 깊은 그리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너무나 잘 알려진 세 곡의 녹턴은 파리에서 작곡되었다.
쇼팽의 악보에 대한 출판권은 프랑스에서는 슐레징거, 독일에서는 라이프히치의프롭스트, 영국에서는 베셀이 가지고 있었
다.
당시 영국에서는 Op.9의 세 곡의 녹턴이 '세느 강의 속삭임'이라는 부제로 출판되었다.
쇼팽은 이 같은 출판사의 상술에 분노를 터트렸다.
하지만 첫 번째 녹턴이 이 부제와 아주 동떨어진 것도 아니었다.
존 필드의 이어 녹턴이라는 장르를 더욱 발전시킨 쇼팽의 재능이21곡의 녹턴에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쇼팽은 스물한 살에 조국, 폴란드를 등지고 아버지의 나라 프랑스에 정착한다.
쇼팽은 예술가로서 가장 풍성하고 고통스러웠던 순간을 파리에서 보냈다.
39년의 짧은 삶을 마감한 곳도 파리였다.
재불 음악평론가잉자 피아니스트 김동준이 파리에서 쇼팽의 흔적을 좇았다.
프랑스인들은 종종 쇼팽을 '프레데릭 쇼팽'이라는 폴란드 이름 대신에 '프랑수아 쇼팽'이라고 부른다.
쇼팽과 프랑스, 특히 파리의 인연은 각별했다.
피아노의 천재이며 시인인 그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될 때가 있다.
프랑스인 아버지 니콜라스 쇼팽과 폴란드인 어머니 유스티나크지자노프스카 사이에서 태어난 쇼팽은 폴란드 바르샤바 근교
에서 출생했다.
그러나 그가 가장 극적인 삶을 보낸 곳은 파리였다.
스무 살에 처음 파리를 방문한 쇼팽이 이 도시를 사랑하게 됐고, 이듬해에 정착해 39세까지 살았다.
예술가로서 길지 않았던 그의 삶이 활짝만개한 곳도, 가장 고통스러웠던 곳도 파리였다.
파리에 도착한 쇼팽에게는 두 가지 야심이 있었다.
피아니스트와 오페라 작곡 가로서 성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큰 연주회보다는 살롱에서 연주하는 것을 선호했던 탓에 피아니스트로서 쇼팽의 성공은 그다지 화려하지 못했다.
오페라 작곡가를 꿈꾸었지만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쇼팽의 시상은 피아노곡을 만들때 솟구쳤다.
결국 피아노곡에 전념한 그는 리스트를 비롯한 후대의 작곡가들, 드뷔시, 라벨, 포레 등이 찬사를 바친 걸작들을 남겼다.
그러한 이유로 프랑스인들은 쇼팽을 '피아노의쿠프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당시 파리에서는 리스트, 헤르츠, 힐러 등의 피아니스트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지금은 완전히 잊혀졌지만 당시 파리 음악계에 대단한 영향력을 지녔던 칼크브레너도 있었다.
쇼팽은 그 앞에서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했다.
칼크브레너는 자신에게 피아노를 더 배우라고 권유했다.
당시 스물한 살이었던 쇼팽은 그의 피아노 기교에 강렬한 인상을 받긴 했지만, 가르침을 받을 생각은 없었다.
누군가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세계를 이루는 것이 예술가의 길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파리에 잠시 머물던 멘델스존 역시 쇼팽의 피아노 연주가 칼크브레너보다 훨씬 나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쇼팽은 결국 칼크브레너의 제자가 되는 대신 파리에서 공식적인 연주회를 열기로 결심한다.
한 명의 피아니스트가 홀로 연주하는 형식의 피아노 리사이틀은 당시로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쇼팽은 파리 카테거리 9번지에 위치한 플라이엘의 살롱에서 베토벤 5중주, 협주곡 2번, 모차르트의 아리아 '손을잡고 저기
로 가자' 주제에 의한 변주곡, 그리고 6명의 피아니스트가 6대의 피아노 위에서 연주하는 '피아노 오케스트라'를 위한 프로
그램을 연주했다.
6명의 피아니스트는 칼크브레너, 힐러, 소빈스키, 오스본느, 스타마티, 그리고 쇼팽이었다.
청중 속에는 멘델스존, 라스트 등이 있었다.
이 연주회는 쇼팽의 음악적인 재능을 파리 음악계의 알린 첫 신호탄이었다.
연주회가 성공하자 그에게 피아노를 배우려는 제자들이 모려들었고, 경제적 사정이 좋아지면서 쇼팽은 베르제르 시테4번가
에 둥지를 틀었다.
이후 쇼세-당탱 거리 5번지로 다시 이사했는데 쇼팽은 경제사정에 따라 파리에서만 모두 아홉 번 이사를 했다,
기록에 의하면, 쇼팽은 감각이 매우 뛰어났고, 당시 고위층 사교계의 많은 여성으로부터 인기를 독차지했다.
리스트와의 열애설로 잘 알려진 마리 다구 백작부인도 쇼팽에게 마음이 끌렸을 정도다.
그러나 이런 기간은 쇼팽이 조르주 상드를 만나기 전까지 5년 정도에 불과했다.
1836년 11월 쇼팽은 파리 리스트의 집에서 조르주 상드와 처음 만난다.
쇼팽의 수많은 피아노 걸작들은 두 사람의 사랑에서 탄생하게 되는데, 특히 피아노를 위한 24개의 전주곡이 대표적인 예다.
쇼팽은 상드가 소유하고 있던 노앙의 집에서 여름을 나곤 했는데 쇼팽의 피아노 소나타, Op.35를 비롯한 작품들이 모두 이
곳에서 탄생했다.
쇼팽의 짧은 생애는 폴란드와 프랑스, 두 나라의 삶으로 나뉜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그가 왜 파리에서 폴란드 민속춤의 리듬을 바탕으로 한 피아노곡, 그러니까 마주르카와 폴로네즈 등
을 작곡했을까 하는 것이다.
그건 아마도 돌아갈 수 없는 곳 조국에 대한 깊은 그리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너무나 잘 알려진 세 곡의 녹턴은 파리에서 작곡되었다.
쇼팽의 악보에 대한 출판권은 프랑스에서는 슐레징거, 독일에서는 라이프히치의프롭스트, 영국에서는 베셀이 가지고 있었
다.
당시 영국에서는 Op.9의 세 곡의 녹턴이 '세느 강의 속삭임'이라는 부제로 출판되었다.
쇼팽은 이 같은 출판사의 상술에 분노를 터트렸다.
하지만 첫 번째 녹턴이 이 부제와 아주 동떨어진 것도 아니었다.
존 필드의 이어 녹턴이라는 장르를 더욱 발전시킨 쇼팽의 재능이21곡의 녹턴에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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