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을 찾아서
페이지 정보

본문
에로이카하우스
베토벤은 1803년 여름에는 바텐에 잠시 머물렀고 그 후 호프차일레 15번지 (19.Hofzeile 15)
혹은 되블링거 하우프트슈트라세 92번지 (19. Doblinger Hauptstra Be 92)에서 지내면서
<교향곡 제3번> , <발트슈타인 소나타 , Op.53>등을 작곡했다.
<교향곡 제3번>을 '영웅 교향곡'으로 부르듯이, 빌헬름 폰 렌츠는 <발트슈타인 소나타>를
'피아노의 영웅 교향곡' 이라고 불렀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는 <발트슈타인 소나타>이전까지는 유능한 아마추어 피아니스트
들이라면 연주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발트슈타인 소나타>는 피아노와 연주자의 기량을 극한까지 몰고 갔고, 연주는
오케스트라와 유사한 효과를 냈다.
어떤 사람은 이 곡을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연옥과 비유하기도 한다.
흔히 되블링거 하우프트슈트라세 92번지를 에로이카하우스(Eroica haus)로 부르지만,
사실 <영웅 교향곡>을 작곡한 장소는 이곳이 아니라 호프차일레 15번지라는 주장이
있다(일부 학자들은 하우프트슈트라세 19번지라고 주장한다).
내가 호프차일레 15번지를 찾았을 때는 현대식 아파트를 짓고 있었다.
베토벤은 1803년 여름부터 1804년 여름까지 오버되블링 지역에 거주하면서 <교향곡 제3번>,
일명 에로이카(Eroica)를 작곡했다.
19세기말 비엔나의 음악 애호가들은 베토벤이 살았던 집들을 추적하기 시작했는데, 베토벤이
살았던 살았던 집들을 추적하기 시작했는데, 베토벤이 1804년 5월에서 가을까지는 가르니존
가세 9-11번지에서 살았고, 그해 여름에는 바덴에 가서 장기체류한 사실은 확인했으나<에로
이카>를 되블링거 하우프트슈트라세 92번지에서 작곡한 것으로 생각하고 그곳에'에로이카하우스'
라는 이름을 붙이고 베토벤이 살던 방으로 추정되는 곳에 몇개의 원본 악보 및 서류들과 베토
벤의 흉상을 전시했던 것이다.
베토벤은 1803년 5월부터 <교향곡 제3번>을 작곡하기 시작하여 1804년 초에 완성했다.
베토벤은 나폴레옹을 프랑스혁명 사상, 즉 자유, 평등, 박애를 구현할 영웅으로 존경한 것은
사실이지만 나폴레옹에 대한 감정은 여러 번 바꾸게 된다.
1799 11월 9일 쿠테타를 일으켜 프랑스의 제1통령이 된 후, 나폴레옹은 프랑스혁명 기간에
교회재산을 몰수해 빚어진 프랑스 정부와 교황청과의 불화를 끝내기 위해 1801년 7월 15일에
교황 피우스7세와 종교협약을 맺었다.
그 직후 1802년 4월 8일 라이프치히의 호프마이스터 출판사는 이를 축하하는 소나타 한 곡을
베토벤에게 주문했지만 베토벤은 이에 대해 격렬하게 거부했다.
"악마에게라도 홀렸소, 호프마이스터 씨?...... 다시 기독교가 지배하기 시작하는 이 시대에
나보고 그런 소나타를 제안하다니.......
그런 일이라면 나를 빼주시오."
그러나 1803년 5월에는 <영웅 교향곡>을 스스로 작곡하여 나폴레옹에게 헌정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 베토벤은 나폴레옹의 이념을 다시 좋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플루타르크의 정신으로 길들여져 로마적 공화주의자였던 베토벤은 '승리의 신'인 나폴레옹의
손으로 기초가 다져진 영웅적인 공화국을 꿈꾸고 있었다.
그래서 베토벤은 자신의 <교향곡 제3번>에 '보나파르트'라는 부제를 달고 1804년 조금씩
다듬기 시작했다.
둘째, 베토벤은 보다 현실적이고 경제적인 판단을 했을 수 있다.
33세의 베토벤은 프랑스로 가서 나폴레옹 밑에서 직업을 구할 생각도 했을지 모른다.
베르나도트가 통로 역할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음악 역사에서 그런 예는 많다.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오페라 작곡가로 모차르트에게도 영향을 주었으며, 베토벤도 그의 아리아
주제로 변주곡을 쓴 적이 있는 파이지엘로(Giovanni Paisiello, 1740~1816)는 페테르부르크,
비엔나를 거쳐 나폴리의 페르디난도 왕의 궁전에서 활동하다가 1792년 나폴레옹의 초청으로
파리에서 활동했다.
나폴레옹은 파이지엘로를 교회음악 책임자 겸 튀일리 궁정악단의 지휘자로 임명했다.
파이지엘로는 1806년에 레지옹 도놔르 훈장을 받았다.
18세기 후반 '이탈리아의 모차르트'라고 불리었던 치마로사(Dome nico Cimarosa, 1749~1801)
는 1787년 예카테리나 2세의 초청으로 조반니 파이지엘로의 후임 궁정음악가로서 페테르부르크
에서 활동했고, 1790년경에는 오스트리아 레오폴트 2세 황제의 초청으로 비엔나에서 활동했다.
1792년 <비밀결혼>이 비엔나에서 초연될 당시 앙코르 공연은 기네스북에 가장 장기간의 앙코르
공연으로 기록되어 있다.
레오폴트 2세 황제는 이 작품을 좋아하여 치마로사에게 1792년 2월 약5,000플로린을 하사했다.
1792년 파이지엘로가 튀일리 궁정악단 지휘자로 초빙되고, 치마로사가 엄청난 포상금을 받은
소문은 이제 막 비엔나에 온 베토벤의 귀에도 들어갔다.
그로부터 10년 후 <영웅 교향곡>을 쓸 무렵 베토벤은, 리히노프스키를 비롯한 초기의 후원자들
보다 더 힘이 있는 새로운 후원자가 필요했고 또 안정적인 직업을 원했다.
베토벤의 그런 필요를 충족시켜준 사람은 바로 루돌프 대공이었다.
오페라 레오노레
1804년 4월 테아터 안 데어 빈이 궁전극장의 감독 페터 폰 브라우 남작(Baron Peter Freiherr
von Braun)에게 소유권이 이전되고, 베토벤은 테아터 안 데어 빈에서 나온다.
<페델리오, Op.72>는 베토벤이 완성한 유일한 오페라 작품이다.
베에토벤 9개의 교향곡, 16개의 현악4중주 , 32개의 피아노 소나타등 많은 곡을 작곡했고 또
성공했으나, 오페라는 단 1개의작품만 썼다.
<피델리오>는 일종의 구원 오페라인데, 처음에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1804년 베토벤은 호프부르크 극장의 관리인 겸 대본가 요제프 존라이트너(Joseph Sonnleithner,
1766~1835)와 함께, <피델리오>의 전신인, <레오노레>를 작곡하기 시작한다.
당시는 프랑스 대혁명(1789~1799)이 막 끝난 시기였고 또 왕정에 항거하는 민중들의 해방과
자유주의 정신에 공감했기 때문에 베토벤은 통속적인 주제보다는 자유, 평등, 박애라는 프랑스
대혁명의 정신을 담을 수 있는 소재를 원했다.
베토벤은 테아터 안 데어 빈에서 나와 1804년 5월부터 6월까지 가르니존가세 9-11번지
(19. Garnisongasse 9-11) 로테스 하우스 (Rotes Haus)에서 살았다.
이곳은 가르니존가세, 프란크가세(Frankgasse),로 텐하우스가세(Rotenhausgasse)사이에
있다.
이곳에서 베토벤은 <교향곡 제5번>도 작곡하기 시작했다.
베토벤은 1803년 여름에는 바텐에 잠시 머물렀고 그 후 호프차일레 15번지 (19.Hofzeile 15)
혹은 되블링거 하우프트슈트라세 92번지 (19. Doblinger Hauptstra Be 92)에서 지내면서
<교향곡 제3번> , <발트슈타인 소나타 , Op.53>등을 작곡했다.
<교향곡 제3번>을 '영웅 교향곡'으로 부르듯이, 빌헬름 폰 렌츠는 <발트슈타인 소나타>를
'피아노의 영웅 교향곡' 이라고 불렀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는 <발트슈타인 소나타>이전까지는 유능한 아마추어 피아니스트
들이라면 연주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발트슈타인 소나타>는 피아노와 연주자의 기량을 극한까지 몰고 갔고, 연주는
오케스트라와 유사한 효과를 냈다.
어떤 사람은 이 곡을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연옥과 비유하기도 한다.
흔히 되블링거 하우프트슈트라세 92번지를 에로이카하우스(Eroica haus)로 부르지만,
사실 <영웅 교향곡>을 작곡한 장소는 이곳이 아니라 호프차일레 15번지라는 주장이
있다(일부 학자들은 하우프트슈트라세 19번지라고 주장한다).
내가 호프차일레 15번지를 찾았을 때는 현대식 아파트를 짓고 있었다.
베토벤은 1803년 여름부터 1804년 여름까지 오버되블링 지역에 거주하면서 <교향곡 제3번>,
일명 에로이카(Eroica)를 작곡했다.
19세기말 비엔나의 음악 애호가들은 베토벤이 살았던 집들을 추적하기 시작했는데, 베토벤이
살았던 살았던 집들을 추적하기 시작했는데, 베토벤이 1804년 5월에서 가을까지는 가르니존
가세 9-11번지에서 살았고, 그해 여름에는 바덴에 가서 장기체류한 사실은 확인했으나<에로
이카>를 되블링거 하우프트슈트라세 92번지에서 작곡한 것으로 생각하고 그곳에'에로이카하우스'
라는 이름을 붙이고 베토벤이 살던 방으로 추정되는 곳에 몇개의 원본 악보 및 서류들과 베토
벤의 흉상을 전시했던 것이다.
베토벤은 1803년 5월부터 <교향곡 제3번>을 작곡하기 시작하여 1804년 초에 완성했다.
베토벤은 나폴레옹을 프랑스혁명 사상, 즉 자유, 평등, 박애를 구현할 영웅으로 존경한 것은
사실이지만 나폴레옹에 대한 감정은 여러 번 바꾸게 된다.
1799 11월 9일 쿠테타를 일으켜 프랑스의 제1통령이 된 후, 나폴레옹은 프랑스혁명 기간에
교회재산을 몰수해 빚어진 프랑스 정부와 교황청과의 불화를 끝내기 위해 1801년 7월 15일에
교황 피우스7세와 종교협약을 맺었다.
그 직후 1802년 4월 8일 라이프치히의 호프마이스터 출판사는 이를 축하하는 소나타 한 곡을
베토벤에게 주문했지만 베토벤은 이에 대해 격렬하게 거부했다.
"악마에게라도 홀렸소, 호프마이스터 씨?...... 다시 기독교가 지배하기 시작하는 이 시대에
나보고 그런 소나타를 제안하다니.......
그런 일이라면 나를 빼주시오."
그러나 1803년 5월에는 <영웅 교향곡>을 스스로 작곡하여 나폴레옹에게 헌정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 베토벤은 나폴레옹의 이념을 다시 좋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플루타르크의 정신으로 길들여져 로마적 공화주의자였던 베토벤은 '승리의 신'인 나폴레옹의
손으로 기초가 다져진 영웅적인 공화국을 꿈꾸고 있었다.
그래서 베토벤은 자신의 <교향곡 제3번>에 '보나파르트'라는 부제를 달고 1804년 조금씩
다듬기 시작했다.
둘째, 베토벤은 보다 현실적이고 경제적인 판단을 했을 수 있다.
33세의 베토벤은 프랑스로 가서 나폴레옹 밑에서 직업을 구할 생각도 했을지 모른다.
베르나도트가 통로 역할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음악 역사에서 그런 예는 많다.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오페라 작곡가로 모차르트에게도 영향을 주었으며, 베토벤도 그의 아리아
주제로 변주곡을 쓴 적이 있는 파이지엘로(Giovanni Paisiello, 1740~1816)는 페테르부르크,
비엔나를 거쳐 나폴리의 페르디난도 왕의 궁전에서 활동하다가 1792년 나폴레옹의 초청으로
파리에서 활동했다.
나폴레옹은 파이지엘로를 교회음악 책임자 겸 튀일리 궁정악단의 지휘자로 임명했다.
파이지엘로는 1806년에 레지옹 도놔르 훈장을 받았다.
18세기 후반 '이탈리아의 모차르트'라고 불리었던 치마로사(Dome nico Cimarosa, 1749~1801)
는 1787년 예카테리나 2세의 초청으로 조반니 파이지엘로의 후임 궁정음악가로서 페테르부르크
에서 활동했고, 1790년경에는 오스트리아 레오폴트 2세 황제의 초청으로 비엔나에서 활동했다.
1792년 <비밀결혼>이 비엔나에서 초연될 당시 앙코르 공연은 기네스북에 가장 장기간의 앙코르
공연으로 기록되어 있다.
레오폴트 2세 황제는 이 작품을 좋아하여 치마로사에게 1792년 2월 약5,000플로린을 하사했다.
1792년 파이지엘로가 튀일리 궁정악단 지휘자로 초빙되고, 치마로사가 엄청난 포상금을 받은
소문은 이제 막 비엔나에 온 베토벤의 귀에도 들어갔다.
그로부터 10년 후 <영웅 교향곡>을 쓸 무렵 베토벤은, 리히노프스키를 비롯한 초기의 후원자들
보다 더 힘이 있는 새로운 후원자가 필요했고 또 안정적인 직업을 원했다.
베토벤의 그런 필요를 충족시켜준 사람은 바로 루돌프 대공이었다.
오페라 레오노레
1804년 4월 테아터 안 데어 빈이 궁전극장의 감독 페터 폰 브라우 남작(Baron Peter Freiherr
von Braun)에게 소유권이 이전되고, 베토벤은 테아터 안 데어 빈에서 나온다.
<페델리오, Op.72>는 베토벤이 완성한 유일한 오페라 작품이다.
베에토벤 9개의 교향곡, 16개의 현악4중주 , 32개의 피아노 소나타등 많은 곡을 작곡했고 또
성공했으나, 오페라는 단 1개의작품만 썼다.
<피델리오>는 일종의 구원 오페라인데, 처음에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1804년 베토벤은 호프부르크 극장의 관리인 겸 대본가 요제프 존라이트너(Joseph Sonnleithner,
1766~1835)와 함께, <피델리오>의 전신인, <레오노레>를 작곡하기 시작한다.
당시는 프랑스 대혁명(1789~1799)이 막 끝난 시기였고 또 왕정에 항거하는 민중들의 해방과
자유주의 정신에 공감했기 때문에 베토벤은 통속적인 주제보다는 자유, 평등, 박애라는 프랑스
대혁명의 정신을 담을 수 있는 소재를 원했다.
베토벤은 테아터 안 데어 빈에서 나와 1804년 5월부터 6월까지 가르니존가세 9-11번지
(19. Garnisongasse 9-11) 로테스 하우스 (Rotes Haus)에서 살았다.
이곳은 가르니존가세, 프란크가세(Frankgasse),로 텐하우스가세(Rotenhausgasse)사이에
있다.
이곳에서 베토벤은 <교향곡 제5번>도 작곡하기 시작했다.
- 이전글바로크 음악의 대가 헨델 13.04.08
- 다음글고전주의 음악과 낭만주의 13.04.08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