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교향곡, 그리고 교향곡 제7번과 제8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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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3년 12월 8일, 요한 멜첼이 주최한 '하나우 전쟁 상이용사들을 위한 자선음악회'가 비엔나
대학 강당에서 베토벤의 지휘로 연주되었다.
프로그램은 <전쟁 교향곡>과 <교향곡 제7번>이었다.
<전쟁 교향곡>은 2부로 된 일종의 전쟁 표제음악인데,
분류상 이곡이 교향곡인지 아니면 교향시인지 논란이 있다.
북과 신호나팔, 전투나팔, 그리고 포격소리까지 동원된다.
초연은 대성공이었는데, 연주회의 성격상 애국적인 기세가 높았던 이유도 있었다.
베토벤은 <전쟁 교향곡>을 자신의 작품들 중 가장 졸작이라고 평했으나 작곡료 및 악보출판
등 수입은 짭짤했다.
<전쟁 교향곡>이 <교향곡 제7번>보다 더 큰 박수를 받았지만, <교향곡 제7번>도 호평이었다.
제2악장은 앙코르를 받아 한 번 더 연주했다.
두 곡 모두 너무 인기가 높아서 4일 뒤인 12월 12일 재공연되었고
이듬해 1월과 2월에도 계속 연주회가 열렸다.
그때마다 제2악장은 앙코르 연주되었다.
그 후 제2악장은 단독으로도 자주 연주되었다.
<교향곡 제7번>은 1811년 테플리체에서 요양하면서 구상하여 1812년에 완성한 것이고,
<교향곡 제8번>은 1811~1813년 사이 완성했다.
(두곡 모두 1813년 4월 20일 루돌프 대공의 사저에서 비공개로함께 초연되었다.
<교향곡 제8번>의 규모가 작아서 그랬는지, 베토벤은 7번 교향곡을
<장대한 교향곡 A장조 (Gross Symphony in A major)> 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내가 이 부분을 쓸 때는 2010년 1월이었고,
나의 집 앞 구러시아 공사관 유적과 덕수궁은 눈으로뒤덮여 있었다.
나는 1812년 작곡된 <교향곡 제7번>의 제2악장을 들으며 나폴레옹이 모스크바의 한겨울 추위,
눈보라, 세찬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퇴각하는 장면을 떠올렸다.
1814년은 베토벤에게도 오스트리아에게도 승리를 안겨주는 한 해 였다.
그러나 수년간 전쟁을 겪은 후 비엔나는 영광의 시간을 되찾았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오스트리아 경제는 곧 침체하고 비엔나는 오랫동안 유럽의 쇠락하는 도시가 되고 말았다.
베토벤의 최고 후원자이자 아직 생존해 있던 두 후원자 리히노프스키 대공과,
라즈모프스키 대공도 변고를 맞는다.
4월 15일 베토벤 최대 후원자 리히노프스키 대공이 53세로 사망했고,
12월 31일에는 라즈모프스키대공의 저택이 큰 화재로 소실되고 대공도 건강을 잃고 은둔하게 된다.
베토벤은 2월부터 6월까지 묄커 바스타이 10번지 2층 바르텐슈타 인쉐스하우스
(Bartensteinsches Haus)에서 지냈다.
베토벤은 새해 1월부터 게오르크 트라이츠케에게 새로운 대본을 의뢰하여
<레오노레>를 <피텔리오>라는 이름으로 개작하였다.
베토벤은 비엔나 황실 도서관 레도텐잘(Imperial Redoutensaal)에서 자신의 지휘로
<교향곡 제8번>을 공개 초연했다.
그는 <교향곡 제8번>을 <소규모의 교향곡 F장조 (Kleine Synphonie in F)>라고 불렀고,
같은 제목으로 출판했다.
<교향곡 제4번>이 <교향곡 제3번>과 <교향곡 제5번>사이에 낀 휴식이었듯이,
<교향곡 제8번>(약25분)도 <교향곡 제7번>(약35분) 과 <제9번 교향곡 >(약69분) 사이에서
잠시 한 걸음 물러난 휴식의 작품이라고 봐도 된다.
이 곡은 1812년 두 번째로 테플리체에 체류하면서 작곡한 것으로 베토벤의 작품으로서는
드물게 밝고명랑한 작품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제7번>과 <제8번>은 비공개로 함께 초연되었는데,
당시 청중들은 <제7번>에만 관심을 표시했고, <제8번>에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베토벤은 이렇게 말했다.
"<교향곡 제8번>이 냉대를 받는 것은 다른 작품보다 더 훌륭하기 때문이다."
베토벤 전기작가이자 노벨상 수상작가 로맹 롤랑은 이렇게 말했다.
"<교향곡 제8번>이야말로 베토벤의 감정을 가장 잘 표현한 교향곡이다.
베토벤에게는 행복한 시간이 그리 오래도록 허용되지 않았다.
그는 "<제8번교향곡>작곡을 완료한 후 둘째 동생의 결혼으로 불편해진 심사로 린츠로 달려갔다.
대학 강당에서 베토벤의 지휘로 연주되었다.
프로그램은 <전쟁 교향곡>과 <교향곡 제7번>이었다.
<전쟁 교향곡>은 2부로 된 일종의 전쟁 표제음악인데,
분류상 이곡이 교향곡인지 아니면 교향시인지 논란이 있다.
북과 신호나팔, 전투나팔, 그리고 포격소리까지 동원된다.
초연은 대성공이었는데, 연주회의 성격상 애국적인 기세가 높았던 이유도 있었다.
베토벤은 <전쟁 교향곡>을 자신의 작품들 중 가장 졸작이라고 평했으나 작곡료 및 악보출판
등 수입은 짭짤했다.
<전쟁 교향곡>이 <교향곡 제7번>보다 더 큰 박수를 받았지만, <교향곡 제7번>도 호평이었다.
제2악장은 앙코르를 받아 한 번 더 연주했다.
두 곡 모두 너무 인기가 높아서 4일 뒤인 12월 12일 재공연되었고
이듬해 1월과 2월에도 계속 연주회가 열렸다.
그때마다 제2악장은 앙코르 연주되었다.
그 후 제2악장은 단독으로도 자주 연주되었다.
<교향곡 제7번>은 1811년 테플리체에서 요양하면서 구상하여 1812년에 완성한 것이고,
<교향곡 제8번>은 1811~1813년 사이 완성했다.
(두곡 모두 1813년 4월 20일 루돌프 대공의 사저에서 비공개로함께 초연되었다.
<교향곡 제8번>의 규모가 작아서 그랬는지, 베토벤은 7번 교향곡을
<장대한 교향곡 A장조 (Gross Symphony in A major)> 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내가 이 부분을 쓸 때는 2010년 1월이었고,
나의 집 앞 구러시아 공사관 유적과 덕수궁은 눈으로뒤덮여 있었다.
나는 1812년 작곡된 <교향곡 제7번>의 제2악장을 들으며 나폴레옹이 모스크바의 한겨울 추위,
눈보라, 세찬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퇴각하는 장면을 떠올렸다.
1814년은 베토벤에게도 오스트리아에게도 승리를 안겨주는 한 해 였다.
그러나 수년간 전쟁을 겪은 후 비엔나는 영광의 시간을 되찾았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오스트리아 경제는 곧 침체하고 비엔나는 오랫동안 유럽의 쇠락하는 도시가 되고 말았다.
베토벤의 최고 후원자이자 아직 생존해 있던 두 후원자 리히노프스키 대공과,
라즈모프스키 대공도 변고를 맞는다.
4월 15일 베토벤 최대 후원자 리히노프스키 대공이 53세로 사망했고,
12월 31일에는 라즈모프스키대공의 저택이 큰 화재로 소실되고 대공도 건강을 잃고 은둔하게 된다.
베토벤은 2월부터 6월까지 묄커 바스타이 10번지 2층 바르텐슈타 인쉐스하우스
(Bartensteinsches Haus)에서 지냈다.
베토벤은 새해 1월부터 게오르크 트라이츠케에게 새로운 대본을 의뢰하여
<레오노레>를 <피텔리오>라는 이름으로 개작하였다.
베토벤은 비엔나 황실 도서관 레도텐잘(Imperial Redoutensaal)에서 자신의 지휘로
<교향곡 제8번>을 공개 초연했다.
그는 <교향곡 제8번>을 <소규모의 교향곡 F장조 (Kleine Synphonie in F)>라고 불렀고,
같은 제목으로 출판했다.
<교향곡 제4번>이 <교향곡 제3번>과 <교향곡 제5번>사이에 낀 휴식이었듯이,
<교향곡 제8번>(약25분)도 <교향곡 제7번>(약35분) 과 <제9번 교향곡 >(약69분) 사이에서
잠시 한 걸음 물러난 휴식의 작품이라고 봐도 된다.
이 곡은 1812년 두 번째로 테플리체에 체류하면서 작곡한 것으로 베토벤의 작품으로서는
드물게 밝고명랑한 작품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제7번>과 <제8번>은 비공개로 함께 초연되었는데,
당시 청중들은 <제7번>에만 관심을 표시했고, <제8번>에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베토벤은 이렇게 말했다.
"<교향곡 제8번>이 냉대를 받는 것은 다른 작품보다 더 훌륭하기 때문이다."
베토벤 전기작가이자 노벨상 수상작가 로맹 롤랑은 이렇게 말했다.
"<교향곡 제8번>이야말로 베토벤의 감정을 가장 잘 표현한 교향곡이다.
베토벤에게는 행복한 시간이 그리 오래도록 허용되지 않았다.
그는 "<제8번교향곡>작곡을 완료한 후 둘째 동생의 결혼으로 불편해진 심사로 린츠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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