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의 시인 쇼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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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금을 통해 쇼팽처럼 피아노의 기능을 최대한으로 살려 피아노가
가지는 특색을 가장 효과적으로 작품을 통해 구현한 사람은 없다.
루빈시타인의 말대로 그는 "피아노의 시인"이다.
쇼팽은 폴란드의 서울 바르샤바에서 멀지 않은 젤라조 볼라라는 마을에서 태어났읍니다.
그의 생일에 관해서는 2월 22일과 3월 1일 설이 있읍니다만 2월 22일이 통설로 되어
있읍니다.
그는 1830년 20세 때에 바르샤바를 떠나 1849년 10월 17일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다시는 이 고향 땅을 밟아 보지 못하고 맙니다.
1m 70cm의 키에, 50kg이 못 되었다는 쇼팽의 작은 체구는 가냘픈 인상을 주었으리라는
추측을 줍니다.
항상 까만 연미복에 하얀 장갑을 끼고 살롱에 나타났다는 쇼팽의 모습은 흡사
우아한 여인의 그 것이었읍니다.
쇼팽 만년의 정부였던 소설가 조르즈 상드의 자서전에도 쇼팽의 모습을 그렇게
묘사하고 있읍니다.
길쭉한 손가락을 지닌 쇼팽의 몸은 그의 정신처럼 화사했다는 것입니다.
쇼팽의 이러한 여성적인 성격은 그의 가정 환경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합니다.
쇼팽은 딸 세 자매의 가운데 외동아들로 그 사이에서 자랐기 때문에 몸이 허약하고
감각이 남달리 섬세한 어린이가 되었다고 합니다.
'피아노의 시인' , '피아노의 혼'이라고 불리는 쇼팽은 프랑스와 폴란드의 피가 섞인
혼혈아 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프랑스에서 취직하고자 폴란드에 온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폴란드의
오랜 귀족의 후예로, 집안이 몰락하여 집안 친척이 되는 스카르벡 백작부인의 가정부로
일하던 여인이었읍니다.
아버지 니콜라우스 쇼팽은, 폴란드 혁명군에 가담해서 대위의 계급에까지 올라갔으며 ,
혁명 뒤에는 프랑스어 교사로 취직, 나중에는 자그마한 학교를 만들어 경영을 했읍니다.
말하자면 지식계급에 속했다고 할 것입니다.
이러한 가정에서 태어난 쇼팽은 마치 피아노를 위해서 태어난 것 같았읍니다.
6세 때, 그의 어머니에게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그는, 8세 때 벌써 대중 앞에 나가
연주를 했고 13세 때에는 그의 스승이 더 이상 가르쳐 줄 필요가 없다고까지 말했읍니다.
1830년 11월, 그는 조국을 떠나 두번째로 비인을 찾고 이어서 독일의 여러 지방을
순회공연한 끝에 1831년 파리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이것은 조국과의 영원한 이별이
되었읍니다.
이때의 유명한 이야기로는 그가 조국을 떠나기 전날 밤, 그의 친구들이 베풀어 준
송별회에서 친구들이 폴란드의 흙을 담은 커다란 은배를 이별의 선물로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을 때, 이 이야기를 아는 그이 친지들이 쇼팽의
무덤에 한 줌의 폴란드 흙을 뿌려 주었다는 일화의 근원이 된 것입니다.
파리에서의 생활은 행복했읍니다.
그는 자기 작품을 중심으로 한 연주회에 의해 폴란드로부터 망명해 와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한, 귀족 사교계의 총아가 되었읍니다.
베를리오즈, 리스트, 벨리니, 그리고 발자크나 하이네와 같은 문인들, 들라크르와 같은
화가와도 친하게 사귀었읍니다.
특히 리스트의 살롱에서 리스트의 소개로 알게 된 프랑스의 유명한 여류 소설가 조르즈
상드와의 사랑의 편력은 쇼팽의 생애의 있어서 매우 중요한 뜻을 지닙니다.
그 뜻은 행복한 면과 불행한 면이 다 같이 크다고 하겠읍니다.
가령 조르즈 상드의 자극이 없었다면 쇼팽의 예술이 그 만큼 높은 수준에 도달했을는
지는 의심스러우며, 한편으로는 야성녀 같은 애정이 쇼팽을 죽음의 길로 재촉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이 9년 동안의 동거 끝에 헤어진 뒤로는 별로 중요한 작품이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에 준다고 하겠읍니다.
상드와 헤어진 쇼팽은 인생 자체가 허무하게 느꼈졌고, 다가오는 죽음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는 것입니다.
원래 쇼팽은 몸이 약했고, 일찍부터 보이지 않는 병균이 가슴을 좀 먹고 있었읍니다.
조르즈 상드와 함께 요양차 마호르카 섬으로 간 일도 있었으나 그의 건강은 악화되기만
했읍니다.
마지막 여행이었던 영국에서의 연주여행에서 온 과로를 이기지 못 한 채 1849년 10월 17일
오전 3시, 화려하고도 짧은 생애를 파리에서 마쳤읍니다.
그의 장례식은 파리음악원의 관현악단과 합창단의 연주와 노래로 모짜르트의 진혼가로
뒤덮였고, 사이 사이에 그의 장송행진곡(피아노 소나나 제2번의 제 3악장)이 울렸으며,
그의 상여는 마이베르와 프레이에르도가 맸다는 것입니다.
관이 무덤 속에 들어갔을 때, 그의 친구들은 폴란드의 흙을 담은 은배를 기울여 관 위에
그의 조국의 흙을 뿌려 주었고, 그의 유언에 따라서 쇼팽의 심장은 바르샤바의 성
십자교회에 우반, 안치되었읍니다.
쇼팽은 피아노라는 악기를 숨 쉬는 생명체로 만든 거의 최초의 사람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모짜르트와 베에토벤, 쇼팽보다 파리에 먼저 데뷔한 리스트와 같은 피아노의 거장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피아노를 사랑하기보다는 표현 능력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들 선배들은 피아노의 음역과 음량 화음의 가능성을 사랑했고 오페라의 무대, 장대한
오케스트라, 문학적인 교향시에 더욱 마음을 두었읍니다.
쇼팽은 피아노를 위해서 태어났고, 피아노와 함께 성장하고 생활하다가 끝내 피아노와
함께 삶을 마친 피아노의 시인이었읍니다.
쇼팽은 음악예술 사상 전혀 독창적인 사람으로, 그가 물려받은 것은 자기 나라 사람이
아닌 외국 사람들 --훔멜 (Johann N.Hummel 1778 ~ 1837, 피아니스트 작곡가),
필드(Jhon Field 1782 1837. 야상곡 형식의 개척자)에 의한 것으로, 단지 외면상의
방법에 지나지 않았읍니다.
그러나 쇼팽은 그런 방법 마저도 얼마 있지 않아 그 자신의 것 인양 놀랄 만큼 빠르게
이를 바꿔 버린 것입니다.
그는 주관적인 감동을 음악으로 객관화하는 경우, 결벽하리만큼 음 이외의 징검다리를
거부했읍니다.
문학과 같은 중개자는 쇼팽의 깔끔한 성미에는 아예 맞지 않았던 것입니다.
쇼팽이 같은 시대의 베를리오즈, 슈만, 리스트 등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여기에
있으며, 그가 베에토벤을 별로 좋아하지 않은 것도 그러한 뜻에서일 것입니다.
그가 가장 존경하고 마음의 스승으로 모셨던 사람은 대 바하였스니다.
쇼팽은 연주회에 앞서 연습 때에는 언제나 자기 작품을 제치고 바하의 작품만을 쳤다는
것입니다.
가지는 특색을 가장 효과적으로 작품을 통해 구현한 사람은 없다.
루빈시타인의 말대로 그는 "피아노의 시인"이다.
쇼팽은 폴란드의 서울 바르샤바에서 멀지 않은 젤라조 볼라라는 마을에서 태어났읍니다.
그의 생일에 관해서는 2월 22일과 3월 1일 설이 있읍니다만 2월 22일이 통설로 되어
있읍니다.
그는 1830년 20세 때에 바르샤바를 떠나 1849년 10월 17일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다시는 이 고향 땅을 밟아 보지 못하고 맙니다.
1m 70cm의 키에, 50kg이 못 되었다는 쇼팽의 작은 체구는 가냘픈 인상을 주었으리라는
추측을 줍니다.
항상 까만 연미복에 하얀 장갑을 끼고 살롱에 나타났다는 쇼팽의 모습은 흡사
우아한 여인의 그 것이었읍니다.
쇼팽 만년의 정부였던 소설가 조르즈 상드의 자서전에도 쇼팽의 모습을 그렇게
묘사하고 있읍니다.
길쭉한 손가락을 지닌 쇼팽의 몸은 그의 정신처럼 화사했다는 것입니다.
쇼팽의 이러한 여성적인 성격은 그의 가정 환경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합니다.
쇼팽은 딸 세 자매의 가운데 외동아들로 그 사이에서 자랐기 때문에 몸이 허약하고
감각이 남달리 섬세한 어린이가 되었다고 합니다.
'피아노의 시인' , '피아노의 혼'이라고 불리는 쇼팽은 프랑스와 폴란드의 피가 섞인
혼혈아 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프랑스에서 취직하고자 폴란드에 온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폴란드의
오랜 귀족의 후예로, 집안이 몰락하여 집안 친척이 되는 스카르벡 백작부인의 가정부로
일하던 여인이었읍니다.
아버지 니콜라우스 쇼팽은, 폴란드 혁명군에 가담해서 대위의 계급에까지 올라갔으며 ,
혁명 뒤에는 프랑스어 교사로 취직, 나중에는 자그마한 학교를 만들어 경영을 했읍니다.
말하자면 지식계급에 속했다고 할 것입니다.
이러한 가정에서 태어난 쇼팽은 마치 피아노를 위해서 태어난 것 같았읍니다.
6세 때, 그의 어머니에게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그는, 8세 때 벌써 대중 앞에 나가
연주를 했고 13세 때에는 그의 스승이 더 이상 가르쳐 줄 필요가 없다고까지 말했읍니다.
1830년 11월, 그는 조국을 떠나 두번째로 비인을 찾고 이어서 독일의 여러 지방을
순회공연한 끝에 1831년 파리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이것은 조국과의 영원한 이별이
되었읍니다.
이때의 유명한 이야기로는 그가 조국을 떠나기 전날 밤, 그의 친구들이 베풀어 준
송별회에서 친구들이 폴란드의 흙을 담은 커다란 은배를 이별의 선물로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을 때, 이 이야기를 아는 그이 친지들이 쇼팽의
무덤에 한 줌의 폴란드 흙을 뿌려 주었다는 일화의 근원이 된 것입니다.
파리에서의 생활은 행복했읍니다.
그는 자기 작품을 중심으로 한 연주회에 의해 폴란드로부터 망명해 와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한, 귀족 사교계의 총아가 되었읍니다.
베를리오즈, 리스트, 벨리니, 그리고 발자크나 하이네와 같은 문인들, 들라크르와 같은
화가와도 친하게 사귀었읍니다.
특히 리스트의 살롱에서 리스트의 소개로 알게 된 프랑스의 유명한 여류 소설가 조르즈
상드와의 사랑의 편력은 쇼팽의 생애의 있어서 매우 중요한 뜻을 지닙니다.
그 뜻은 행복한 면과 불행한 면이 다 같이 크다고 하겠읍니다.
가령 조르즈 상드의 자극이 없었다면 쇼팽의 예술이 그 만큼 높은 수준에 도달했을는
지는 의심스러우며, 한편으로는 야성녀 같은 애정이 쇼팽을 죽음의 길로 재촉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이 9년 동안의 동거 끝에 헤어진 뒤로는 별로 중요한 작품이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에 준다고 하겠읍니다.
상드와 헤어진 쇼팽은 인생 자체가 허무하게 느꼈졌고, 다가오는 죽음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는 것입니다.
원래 쇼팽은 몸이 약했고, 일찍부터 보이지 않는 병균이 가슴을 좀 먹고 있었읍니다.
조르즈 상드와 함께 요양차 마호르카 섬으로 간 일도 있었으나 그의 건강은 악화되기만
했읍니다.
마지막 여행이었던 영국에서의 연주여행에서 온 과로를 이기지 못 한 채 1849년 10월 17일
오전 3시, 화려하고도 짧은 생애를 파리에서 마쳤읍니다.
그의 장례식은 파리음악원의 관현악단과 합창단의 연주와 노래로 모짜르트의 진혼가로
뒤덮였고, 사이 사이에 그의 장송행진곡(피아노 소나나 제2번의 제 3악장)이 울렸으며,
그의 상여는 마이베르와 프레이에르도가 맸다는 것입니다.
관이 무덤 속에 들어갔을 때, 그의 친구들은 폴란드의 흙을 담은 은배를 기울여 관 위에
그의 조국의 흙을 뿌려 주었고, 그의 유언에 따라서 쇼팽의 심장은 바르샤바의 성
십자교회에 우반, 안치되었읍니다.
쇼팽은 피아노라는 악기를 숨 쉬는 생명체로 만든 거의 최초의 사람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모짜르트와 베에토벤, 쇼팽보다 파리에 먼저 데뷔한 리스트와 같은 피아노의 거장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피아노를 사랑하기보다는 표현 능력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들 선배들은 피아노의 음역과 음량 화음의 가능성을 사랑했고 오페라의 무대, 장대한
오케스트라, 문학적인 교향시에 더욱 마음을 두었읍니다.
쇼팽은 피아노를 위해서 태어났고, 피아노와 함께 성장하고 생활하다가 끝내 피아노와
함께 삶을 마친 피아노의 시인이었읍니다.
쇼팽은 음악예술 사상 전혀 독창적인 사람으로, 그가 물려받은 것은 자기 나라 사람이
아닌 외국 사람들 --훔멜 (Johann N.Hummel 1778 ~ 1837, 피아니스트 작곡가),
필드(Jhon Field 1782 1837. 야상곡 형식의 개척자)에 의한 것으로, 단지 외면상의
방법에 지나지 않았읍니다.
그러나 쇼팽은 그런 방법 마저도 얼마 있지 않아 그 자신의 것 인양 놀랄 만큼 빠르게
이를 바꿔 버린 것입니다.
그는 주관적인 감동을 음악으로 객관화하는 경우, 결벽하리만큼 음 이외의 징검다리를
거부했읍니다.
문학과 같은 중개자는 쇼팽의 깔끔한 성미에는 아예 맞지 않았던 것입니다.
쇼팽이 같은 시대의 베를리오즈, 슈만, 리스트 등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여기에
있으며, 그가 베에토벤을 별로 좋아하지 않은 것도 그러한 뜻에서일 것입니다.
그가 가장 존경하고 마음의 스승으로 모셨던 사람은 대 바하였스니다.
쇼팽은 연주회에 앞서 연습 때에는 언제나 자기 작품을 제치고 바하의 작품만을 쳤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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