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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주의 독일가곡 세계를 개척한[가곡왕]슈베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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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782회 작성일 13-04-08 0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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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솟듯 넘쳐 흐르는 악상으로 17세에 "실잣는 그레첸" 18세에
"마왕" "들장미"등 유명한 가곡을 작곡하여 천재적 재질을 발휘했고,
사상불멸의 주옥 같은 600여 가곡 외에 "미완성 교향곡"등 기악
분야에서도 아름다운 선율과 풍부한 낭만적 정서로 독자적
이채를 남긴 가곡왕 슈베르트

'가곡 왕'으로 불리우는 슈베르트는 1797년 1월 31일 비인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프란쯔 테오도르는 모라바의 농촌 출신, 어머니인 마리아 엘리자벳은 모라바의
직공 집안 출신이었읍니다.
아버지는 비인에서 교원양성 교육을 받은 뒤 리히텐탈에서 국민학교를 경영하고 있었읍니다.
슈베르트는 네째 아들로서, 어려서부터 음악적 재능을 나타냈는데, 8세 때부터 아버지와
이웃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부터 바이얼린 , 피아노 , 성악 , 오르간 등을 배웠읍니다.

1808년 왕실예배당의 소년가수 시험에 합격하여 국립신학교 기숙사에 수용되었읍니다.
이곳에서 피어리스트 수도회의 규정에 따른 훈련과 일반교육 및 음악교육을 받았읍니다.
재학중에는 학생 오케스트라에 참가하여 , 모짜르트 , 하이든 , 등의 서곡 , 교향곡을
익히고 , 예배에서는 미하엘 하이든 , 폭스 , 예베를린 등의 노래곡을 불렀으며, 정지휘자가
부재중에는 지휘봉을 드는 일도 있었읍니다.
또 저명한 극장의 오페라를 들을 기회도 자주 있었고, 평생 변함없는 우정을 나눈 시파운을
사귀게도 되었읍니다.

1813년, 변성기로 인하여 콘빅트를 떠났으나 때때로 이곳에 와서 작곡등을 렛슨을 받기도
했읍니다.
슈베르트는 재학중에 이미 상당한 작품을 완성하였는데, 그중 어떤 것은 습작의 테두리를
넘어선 수준이었읍니다.
1년간의 교원 양성 과정을 마치고 아버지가 경영하던 학교의 조수로 있으면서 대작에 착수,
제1교향곡 D장조 완성하였고, 이어 오페라 "악마의 별장"에 착수하여 1814녀 5월 14일에
일단 완성하였다가 다시 살리에리의 조언에 따라 개작, 10월에 완성 하였읍니다.
6월에는 F장조의 미사곡을 완성, 10월에 초연해서 호평을 받게 되자 그의 이름이 비인 시민
사이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읍니다.
이때 소프라노 독창을 맡은 이웃 상인의 딸 테레제 그로프는 슈베르트가 평생 잊을 수 없던
애모의 대상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해 10월에 작곡한 "실잣는 그레첸"은 슈베르트의 가곡의 장래의 방향을 나타내는
작품이기도 했읍니다.

1815녀, 18세 때는 생애 중에서도 드문 다작의 해로서, "들장미" "마왕" "뜨거운 사랑" 등의
명작을 포함한 약140여 가곡, G장조의 미사곡, 제2 교향곡 B플랫장조, 미완성의 작품을
포함한 4곡의 오페라, 그 밖의 것이 작곡되었읍니다.

1816년, 슈베르트는 교직에서 물러나고, 청년 쇼버의 집안 신세를 지면서 작곡에 전념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을 얻게 되자,
제4교향곡 c단조 "비극적", 가곡 "마부 크로노스에게", "자장가", "방량자",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에서의 "하프주자의노래"등을 작곡했읍니다.

특히, 1817년에 작곡된 4곡의 피아노 소나타 (D 459 , 537 , 568 , 575)는 교직을 포기하고
작곡가로서의 강한 자각을 가진 시기의 정신적 상태를 반영한 것이라 보여집니다.
이들은 최초의 피아노 소나타라고 해도 좋을 만한 것으로서, 교향곡이나 실내악, 또는 리
드가 일찍부터 쓰여진 데 비해 이 장르에 대한 작곡가의 강한 책임감이 엿보입니다.
이들 소나타에는 그 후의 다악장제 소나타에 대한 사고방식의 모텔이 인정되며, 양식사적
으로도 흥미 깊은 작품이 되고 있읍니다.
"죽음과 소녀", "타르타루스의 무리"와 그 밖의 약 50곡의 리드도 계속 쓰여졌읍니다.
또 "이탈리아풀 서곡" 2곡과 "교향곡 5번"도 작곡되었는데, 여기에는 당시 비인에서 호평을
받고 있던 롯시니의 영향이 엿보입니다.
슈베르트의 음악에 있어서 이탈리아 양식은 특히 오페라에서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읍니다.

생애중 거의 비인을 떠나지 않았던 슈베르트에게 환경의 변화가 찾아왔읍니다.
그것은 1818년과 1824년 여름에 에스테르하지 가(家)의 딸을 위한 음악 교사로서 헝가리의
젤레스에 머물렀던일과, 1819년과 1825년에는 그의 리드에 대한 깊은 이해자였던 포글과
오스트리아 상부의 시타이어로 여행을 했던 일입니다.
그때마다 슈베르트는 몇 편의 피아노 연탄곡과 독주곡을 작곡했는데, "네 손용 피아노
소나타" (D 617), "자작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
(D 813) 등은 젤레스에 머물렀던 일, 피아노 5중주곡 "송어"는 시타이어 여행이 각각 인연이
되어 태어난 것입니다.

1826년, 공석중인 오스트리아 황제의 궁정예배당의 부악장 자리를 노렸으나 실패로 돌아간
슈베르트는, 이해에도 피아노의 명작 "G장조 소나타 (op. 78)"를 작곡했읍니다.
이 곡은 통상 "판타지"란 이름으로 알려져 있읍니다.
가곡으로는 셰익스피어의 "심벨린" 중에서 "들어라", 들어라, 종달새"를 이 교회의 야외
맥주집에서 담소하는 사이에 작곡하였읍니다.
동생 페르디난트가 1845년에 무반주 남성 합창곡으로 편곡한 이래 유명해진 "독일미사"
이 해부터 27년에 걸쳐서 작곡된 것으로서 원곡은 혼성 4부합창, 관악기 및 오르간 반주가
딸려 있읍니다.
op. 99의 상쾌한 B플랫장조의 피아노 트리오는 1827년의 작품이지만 작곡 날짜는 분명치
않읍니다. op. 90과 142의 즉흥곡도 이해의 작품이라고 합니다.
이보다도 중요한 작품은 연가곡 "겨울 나그네" 입니다.
곡이 완성되자 곧 출판되었으니 당시에는 그렇게 호평을 받지 못했읍니다.

이해 3월, 베에토벤의 건강이 두드러지게 악화되었읍니다.
신들러가 슈베르트의 가곡과 피아노곡을 그에게 보였는데 커다란 흥미를 보였다고 합니다.
훼텐브레너 형제는 전부터 슈베르트가 베에토벤을 신처럼 존경하고 있던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3월 19일에 슈베르트를 데리고 문병하러 갔었읍니다.
그러나 슈베르트는 베에토벤에게 한 마디의 말도 못하고 머뭇 거리다가 자리에서 일어서
버렸다고 합니다.
베에토벤은 26일에 세상을 떠났고, 29일의 성대한 장례식 때 슈베르트는 관 앞에서 횃불을
들고 장례식 행렬을 따라갔읍니다.

1828년 1월 28일 밤, 시파운의 자택에서는 성대한 슈베르티아데가 개최되었읍니다.
이것이 그의 최후의 모임이 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읍니다.
3월 16일에는 오래 전부터 그가 열망하던 자기 작품만의 연주회가 개최되고 친구들의
동분서주로 많은 수입을 얻을 수가 있었읍니다.
이러한 기쁨에 자극받았음인지 그달에는 C장조의 대 교향곡, 6월에는 E플랫장조의 대
미사곡이 완성되었읍니다.
슈베르트는 곧잘 문학가들이 모이는 독서회에도 참석했었는데 이해에는 하이네와 렐시타프의
시를 읽게 되어 이것에 곡이 붙이게 되었읍니다.
이것이 사망 후 편집된 "백조의 노래"입니다.

이처럼 생애를 비인을 떠나지 않고 오로지 창작에만 몰두해 오던 슈베르트는 이 해 가을 동생
페르디난트의 집으로 옮겼는데, 음료수에 섞인 티푸스균에 감염되어 11월 19일 오후 3시,
31세의 짧은 생애를 마치고 영원히 잠들었읍니다.

장례식은 11월 21일 마르가르텐의 성 요제프 교회에서 거행됐고, 유해는 유언에 따라 벨링크
묘지의 베에토벤의 무덤 가까운 곳에 매장되었고, 1830년 여름 이 무덤에 흉상이 놓여졌읍니다.
1888녀, 현재는 비인 시에 편입된 지멜링크의 중앙묘지로 이장되었고, 흉상은 슈베르트의
생가로 옮겨졌읍니다.

슈베르트는 가난한 생활속에서 31세의 짧은 생애였지만, 600곡이 넘는 예술가곡을 비롯하여
교향곡, 피아노곡, 실내악곡 등 많은 유산을 남겼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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