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주의 음악의 완성자! 베에토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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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주의 음악의 선구자!
동서고금을 통하 위대한 음악가 베에토벤!
베에토벤의 음악이 사람의 가슴을 치는 이유는
고통과 빈곤과 병마에 시달리면서 이를 극복하고,
강인한 의지로 정화된 인간적 정신세계로
승화시킨 불후의 명곡들을 남겼다는 데 있다.
베에토벤은 1770년 12월 본에서 태어났읍니다.
이 무렵의 본은 인구 3만이 채 못되는 자그마한 도시였으나 쾰른의 선제후(選帝候)의
궁전이 위치하고 있었던 까닭에 문화적으로 비교적 발전된 곳이었으며 또한 음악도
성황을 이루고 있었읍니다.
그는 아버지인 요한 반 베에토벤은 궁정 악단에서 테너를 부르는 가수였으며, 그가
자랄 무렵에는 모짜르트의 신동스런 재주가 화제의 중심이 되고 있었던 탓에 그의 아버지도
베에토벤을 신동으로 만들고 싶어 했읍니다.
그 결과 8세 때에는 소년 쳄발로 연주자로서 공연을 갖게 되었으며, 2년 뒤에는 작곡도 하게
되었읍니다.
이 무렵부터 베에토벤은 크리스챤 고트리프 네페를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으며, 그에게서
능력을 인정받아 음악의 도시인 비인으로 유학을 떠나게 됩니다.
1787년의 일입니다.
그러나 이때의 비인 유학에서는 별다른 소득없이 돌아와야 했읍니다.
그것은 고향에서 온 편지가 그의 어머니의 위독함을 알려 왔기 때문이었읍니다.
서둘러 돌아오긴 했지만 얼마 안있어 그의 어머니는 불귀의 황천객이 되었고, 아버지는 더욱
술에 젖어들게 됐읍니다.
그러한 중에는 음악을 향한 베에토벤의 노력은 계속됩니다.
베에토벤이 선제후의 호의로 비인에 다시 유학하게 된 것은 그의 나이22세 때의
가을이었읍니다.
그러나 생활은 넉넉치 못해 고생이 심하였고, 그 수학(修學)도 별로 신통 할 것이 없었던가
봅니다.
오히려 그는 실사회에서의 활동에 몰두해서 많은 연주회를 가졌고 또 상당히 먼 연주여행을
갖기도 했었읍니다.
이리하여 베에토벤은 신진 음악가로서의 위치를 착실하게 점령해 들어갔고 대가로 손꼽힐
날도 멀지 않은 듯 하였읍니다.
이렇듯 어려운 노력의 열매가 맺어 갈 무렵, 그에게는 남에게 말할 수 없는 깊은 괴로움이
있었읍니다.
그가 귀를 앓기 시작한 것은 25.6세때 부터였는데 30이 가까와지면서 그 증세는 심상치 않은
것이었읍니다.
그것은 음악가로서는 치명적인 타격이 아닐 수 없었읍니다.
어느날 베에토벤은 요양지에서 문안 온 제자 라이스를 데리고 산책을 나갔읍니다.
라이스는 시냇물이 흐르는 소리라든가 목동의 노랫소리가 정말 아름답다면서 즐거워했읍니다
만은 베에토벤에게는 그러한 것이 전혀 들리지 않았습니다.
헤어날 수 없이 깊은 절망의 수렁에 빠진 그는 그날로 두 동생에게 비통한 편지를 씁니다.
하일리 겐시타트의 유서라고 불리우는 이 편지는 한 위대한 예술가가, 아니 한 위대한 인간의
영혼이 적나라에게 자기를 노출한 것으로 오늘날도 보는 이의 가슴을 뜨겁게 합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자살을 할 수 있을 만큼 약한 사나이는 못 됐는지 편지의 끝에 가서는
"죽음이 올 때까지는 신이 자신에게 부과한 사명에 따라 인류를 위해 창작하겠다"고
다짐하고 있읍니다.
하일리 겐시타트의 유서는 어떻든 베에토벤에게 새로운 출발을 기약하게 하였읍니다.
과거를 탈피하고 새로운 전환을 결심하게 된 그는 비인에 돌아와서 새로운 작곡에 몰두
합니다.
이로부터 그의 작곡 형식은 전통적인 공식에서 벗어나 더욱 자유로와지며, 그 표현도 기품
있는 아름다움에서 한발 더 나아가 굳세고 웅대하며 박력 있는 것이 되어갑니다.
이것이 후세의 연구가들로부터 창작의 제2기라고 불리우는 시기가 되는데, 이로부터 그의
음악은 정열과 힘에 가득찬, 심각하고 드높은 것으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 제2기 작품에는 "크로이째르 소나타"를 비롯하여 제3에서 제8까지의 교향곡 6곡, 제4와
제5 피아노 협주곡, 바이얼린 협주곡, "템페스트 소나타(작품31의 2)에서 시작해서 작품
90까지의 소나타, 오페라 피델리오"등의 명곡이 있읍니다.
베에토벤의 시대는 한마디로 말해서 나폴레옹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1814년 운이 다한 나폴레옹이 엘바 섬에 유형되자 바로 그해 9월에 비인에서는 그
뒷치닥거리를 위한 국제회의가 열렸읍니다.
열국의 고관 현직이 모인 가운데서 베에토벤은 그들을 위해 작곡하기도 하고 연주하기도
했읍니다.
그의 명성은 온 세계로 퍼져 나갔읍니다만 한편으로는 어두운 그림자가 다가들고 있었읍니다.
1815년 그의 동생 카알이 죽자 유언에 따라 그 아들의 양육을 베에토벤이 맡습니다만 이미
불량화됐던 소년 카알은 두고두고 베에토벤의 속을 썩히기나 합니다.
한편 가까운 벗이나 후원자들도 세상을 떠났거나 비인을 떠나 멀리 헤어 졌읍니다.
그리고 흐르는 세월을 따라 비인의 음악 취미도 바뀌어, 이상주의 적인 것보다는 낭만주의적인
것을 , 장중한 것보다는 경쾌한 것을 즐겼으므로 그의 음악에서 등을 돌리기 시작 했읍니다.
모든 것이 여의치 못한 가운데 건강은 더욱 악화되고 귀는 전혀 들리지 않게 되었읍니다.
베에토벤은 더욱 내성적이고 고독한 사람이 되어 갔으며, 창작의 제3기로 접어듭니다.
이 만년의 작품 가운데에는 '최후의 소나타'라고 불리는 작품 101 이하의 다섯 곡의 피아노
소나타. 장엄미사와 제9교향곡, 최후의 여섯 곡의 4중주 곡 등이 있읍니다만 모두가 내면적인
심각한 작품들이며, 제2기의 작품들이 추구했던 '힘'보다는 '동경'을 담은 작품들이라
하겠읍니다.
1826년 가을, 그는 조카를 데리고 동생 요한에게로 여행합니다.
여기서 감기에 걸린 그는 이상한 예감에 사로 잡혀 병을 무릅쓰고 귀로를 재촉하니다.
한겨울의 12월 혹한 속의 여행은 병을 더욱 악화시켰고 비인에 도착했을때는 폐렴까지도
발병하게 되었읍니다.
1827년 3월 26일, 그의 영혼은 57년간 몸 담았던 육체를 버리고 돌아오지 않는 여행길을
떠났읍니다.
3월 29일, 그의 장례는 2만의 흐느끼는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행하여지고, 한많은 육신을
베링거 묘지에 묻었읍니다.
사실, 오늘날까지도 베에토벤의 음악과 같이 우리 마음에 감동을 주는 것은 많지 않습니다.
비록 그것이 사람을 졸도시키기까지 하지는 않는더라도 끊임없는 힘과 위안과 구원(救援)을
우리 인생에 주고 있읍니다.
우리들은 이 세상에 베에토벤의 음악이 있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깊이 감사해야 하겠읍니다.
동서고금을 통하 위대한 음악가 베에토벤!
베에토벤의 음악이 사람의 가슴을 치는 이유는
고통과 빈곤과 병마에 시달리면서 이를 극복하고,
강인한 의지로 정화된 인간적 정신세계로
승화시킨 불후의 명곡들을 남겼다는 데 있다.
베에토벤은 1770년 12월 본에서 태어났읍니다.
이 무렵의 본은 인구 3만이 채 못되는 자그마한 도시였으나 쾰른의 선제후(選帝候)의
궁전이 위치하고 있었던 까닭에 문화적으로 비교적 발전된 곳이었으며 또한 음악도
성황을 이루고 있었읍니다.
그는 아버지인 요한 반 베에토벤은 궁정 악단에서 테너를 부르는 가수였으며, 그가
자랄 무렵에는 모짜르트의 신동스런 재주가 화제의 중심이 되고 있었던 탓에 그의 아버지도
베에토벤을 신동으로 만들고 싶어 했읍니다.
그 결과 8세 때에는 소년 쳄발로 연주자로서 공연을 갖게 되었으며, 2년 뒤에는 작곡도 하게
되었읍니다.
이 무렵부터 베에토벤은 크리스챤 고트리프 네페를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으며, 그에게서
능력을 인정받아 음악의 도시인 비인으로 유학을 떠나게 됩니다.
1787년의 일입니다.
그러나 이때의 비인 유학에서는 별다른 소득없이 돌아와야 했읍니다.
그것은 고향에서 온 편지가 그의 어머니의 위독함을 알려 왔기 때문이었읍니다.
서둘러 돌아오긴 했지만 얼마 안있어 그의 어머니는 불귀의 황천객이 되었고, 아버지는 더욱
술에 젖어들게 됐읍니다.
그러한 중에는 음악을 향한 베에토벤의 노력은 계속됩니다.
베에토벤이 선제후의 호의로 비인에 다시 유학하게 된 것은 그의 나이22세 때의
가을이었읍니다.
그러나 생활은 넉넉치 못해 고생이 심하였고, 그 수학(修學)도 별로 신통 할 것이 없었던가
봅니다.
오히려 그는 실사회에서의 활동에 몰두해서 많은 연주회를 가졌고 또 상당히 먼 연주여행을
갖기도 했었읍니다.
이리하여 베에토벤은 신진 음악가로서의 위치를 착실하게 점령해 들어갔고 대가로 손꼽힐
날도 멀지 않은 듯 하였읍니다.
이렇듯 어려운 노력의 열매가 맺어 갈 무렵, 그에게는 남에게 말할 수 없는 깊은 괴로움이
있었읍니다.
그가 귀를 앓기 시작한 것은 25.6세때 부터였는데 30이 가까와지면서 그 증세는 심상치 않은
것이었읍니다.
그것은 음악가로서는 치명적인 타격이 아닐 수 없었읍니다.
어느날 베에토벤은 요양지에서 문안 온 제자 라이스를 데리고 산책을 나갔읍니다.
라이스는 시냇물이 흐르는 소리라든가 목동의 노랫소리가 정말 아름답다면서 즐거워했읍니다
만은 베에토벤에게는 그러한 것이 전혀 들리지 않았습니다.
헤어날 수 없이 깊은 절망의 수렁에 빠진 그는 그날로 두 동생에게 비통한 편지를 씁니다.
하일리 겐시타트의 유서라고 불리우는 이 편지는 한 위대한 예술가가, 아니 한 위대한 인간의
영혼이 적나라에게 자기를 노출한 것으로 오늘날도 보는 이의 가슴을 뜨겁게 합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자살을 할 수 있을 만큼 약한 사나이는 못 됐는지 편지의 끝에 가서는
"죽음이 올 때까지는 신이 자신에게 부과한 사명에 따라 인류를 위해 창작하겠다"고
다짐하고 있읍니다.
하일리 겐시타트의 유서는 어떻든 베에토벤에게 새로운 출발을 기약하게 하였읍니다.
과거를 탈피하고 새로운 전환을 결심하게 된 그는 비인에 돌아와서 새로운 작곡에 몰두
합니다.
이로부터 그의 작곡 형식은 전통적인 공식에서 벗어나 더욱 자유로와지며, 그 표현도 기품
있는 아름다움에서 한발 더 나아가 굳세고 웅대하며 박력 있는 것이 되어갑니다.
이것이 후세의 연구가들로부터 창작의 제2기라고 불리우는 시기가 되는데, 이로부터 그의
음악은 정열과 힘에 가득찬, 심각하고 드높은 것으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 제2기 작품에는 "크로이째르 소나타"를 비롯하여 제3에서 제8까지의 교향곡 6곡, 제4와
제5 피아노 협주곡, 바이얼린 협주곡, "템페스트 소나타(작품31의 2)에서 시작해서 작품
90까지의 소나타, 오페라 피델리오"등의 명곡이 있읍니다.
베에토벤의 시대는 한마디로 말해서 나폴레옹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1814년 운이 다한 나폴레옹이 엘바 섬에 유형되자 바로 그해 9월에 비인에서는 그
뒷치닥거리를 위한 국제회의가 열렸읍니다.
열국의 고관 현직이 모인 가운데서 베에토벤은 그들을 위해 작곡하기도 하고 연주하기도
했읍니다.
그의 명성은 온 세계로 퍼져 나갔읍니다만 한편으로는 어두운 그림자가 다가들고 있었읍니다.
1815년 그의 동생 카알이 죽자 유언에 따라 그 아들의 양육을 베에토벤이 맡습니다만 이미
불량화됐던 소년 카알은 두고두고 베에토벤의 속을 썩히기나 합니다.
한편 가까운 벗이나 후원자들도 세상을 떠났거나 비인을 떠나 멀리 헤어 졌읍니다.
그리고 흐르는 세월을 따라 비인의 음악 취미도 바뀌어, 이상주의 적인 것보다는 낭만주의적인
것을 , 장중한 것보다는 경쾌한 것을 즐겼으므로 그의 음악에서 등을 돌리기 시작 했읍니다.
모든 것이 여의치 못한 가운데 건강은 더욱 악화되고 귀는 전혀 들리지 않게 되었읍니다.
베에토벤은 더욱 내성적이고 고독한 사람이 되어 갔으며, 창작의 제3기로 접어듭니다.
이 만년의 작품 가운데에는 '최후의 소나타'라고 불리는 작품 101 이하의 다섯 곡의 피아노
소나타. 장엄미사와 제9교향곡, 최후의 여섯 곡의 4중주 곡 등이 있읍니다만 모두가 내면적인
심각한 작품들이며, 제2기의 작품들이 추구했던 '힘'보다는 '동경'을 담은 작품들이라
하겠읍니다.
1826년 가을, 그는 조카를 데리고 동생 요한에게로 여행합니다.
여기서 감기에 걸린 그는 이상한 예감에 사로 잡혀 병을 무릅쓰고 귀로를 재촉하니다.
한겨울의 12월 혹한 속의 여행은 병을 더욱 악화시켰고 비인에 도착했을때는 폐렴까지도
발병하게 되었읍니다.
1827년 3월 26일, 그의 영혼은 57년간 몸 담았던 육체를 버리고 돌아오지 않는 여행길을
떠났읍니다.
3월 29일, 그의 장례는 2만의 흐느끼는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행하여지고, 한많은 육신을
베링거 묘지에 묻었읍니다.
사실, 오늘날까지도 베에토벤의 음악과 같이 우리 마음에 감동을 주는 것은 많지 않습니다.
비록 그것이 사람을 졸도시키기까지 하지는 않는더라도 끊임없는 힘과 위안과 구원(救援)을
우리 인생에 주고 있읍니다.
우리들은 이 세상에 베에토벤의 음악이 있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깊이 감사해야 하겠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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